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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산관련·정보

단조산성

by 가시덤풀 2012. 7. 28.

<사진출처> '울산대 박물관 홈페이 지'

     천연요새의 기능, 단조산성
취서산 정상에서 영취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오르면 60여만평의 억새평원을 볼 수 있는데 이 억새평원을 가로지르는 긴 돌담이 단조성(丹鳥城)이다.
현재 이 돌담은 서북쪽으 로는 많이 허물어 졌으나 동남쪽으로는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 다.

옛 문헌에는 단조성에 관해 많이 언급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는 단조성을 취서산고성(鷲栖山古城)이라고 하였고, ≪증보문헌비고≫에 는 언양의 남쪽 13리에 있는 취서산에 이 성이 있다고 기록해 놓고 있 다.

전설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한 장수가 "조선에 성이 많지만 이 성을 빼앗겨서는 안된다."는 애기를 했고 영조 3년(1727) 암 행어사 박문수(朴文秀)가 영남을 시찰하는 도중 이 산성에 올라 "산성의 험준함 이 한명의 장부가 만명의 적을 당해낼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해 이 곳이 천연의 요새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 성이 단지성(丹之城)으 로 불리는 것 역시 이런 요새적인 위치와 무관하지 않는 것 같다.
단 지성이라 함은 바로 항성(缸城)으로 모양이 항아리(단지) 같이 생겼음 을 뜻한다. 실제로 취서산은 정상이 동서로는 좁은편이고 남북으로 긴 형태를 보이고 있어 이런 지형을 이용하여 성을 쌓아 그 모양이 마치 단지같 이 생겼고 따라서 천연 요새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성이 있는 꼭대기를 단조봉(丹鳥峰)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성의 이름에 서 유래된 것 같다.
그런데 이 성에는 임진왜란 때부터 전해 오는 슬 픈 전설이 있어 지금도 듣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정규군은 왜군에 형편없이 패했지만 지방의 의병들은 그 래도 왜적과 싸우면서 이 땅을 지켜 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언양 인근의 의병들이 북상하는 왜병들을 저지하기 위해 이 성에 모여들 었다.

부산에서 출발해 양산, 언양을 거쳐 북으로 진군하려던 왜군들은 의병 들이 단조성을 지키면서 강력히 대항하자 더 이상 북상을 할 수 없었다. 이 때 왜군들은 이 성을 공략하기 위해 오랫동안 싸웠으나 성의 함락이 쉽지 않은 것을 알고 성의 정찰에 나섰다.
이 때 왜군들은 영취산 정상 바 로 아래에 있는 바위굴에서 베를 짜고 있던 사람을 발견하고 이 사람에 게 이 성의 지형에 대해 물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여천각시였다고 한 다.
이 때 왜군은 아군으로 위장하여 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물었 기 때문에 여천각시는 서슴치 않고 영취산을 돌아 서편에 있는 백발등 으로 들어가면 쉽게 입성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이 말 을 들은 왜군은 바로 그날 백발등으로 들어가 의병을 쳐부수니 지금 까지 후퇴하지 않고 이 성을 지켰던 의병들이 한꺼번에 전사를 하고 말았다 고 한다.
당시 아군이 흘린 피가 얼마나 많았던지 피로 못을 이루었다는 애 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단조성 아래에는 진풀이 있는데 오늘날에도 이 진풀에 불그스레한 이끼가 끼는 것은 당시 의병들이 흘린 피 때문이라는 애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전설은 내용이 비슷 하지만 여천각시 대신 떡 장수가 등장하는 것이 차이가 있다.
즉 왜군에게 단조성을 공략할 수 있는 길을 가리켜 준 사람이 여천각시가 아니고 이 곳 인근에서 떡을 팔던 할머니였다는 애기다.
당시 단조성 공략이 어 려웠던 왜병장이 인근에서 떡을 팔고 있는 노파에게 떡을 모두 팔아준 후  이 산의 형세를 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노파는 이 산의 형태가 흡사 산나운 개가 앉아 있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왜군은 취서산을 우회해 산뒷편에서 공격을 해 단조성을 함락시켰다고 한다.
이 때 왜병들은 단조성의 백발등으로 쳐들어가 성을 함락하엿다고 전한 다.

취서산에는 억새풀이 많다. 그런데 이 풀들이 가을이 되면 흡사 나이든 사람의 백발 처럼 흰 모습을 보이면서 흔들리기 때문에 억새풀이 휘날리 는 이 언덕을 백발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전설을 들어 보면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려 했던 우리 조상들이 엄 청나게 희생이 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이런 안타까움은 현재 이성 인근에 있 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고 있는 설화에서도 알 수 있 다.
지금도 이 지역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원수로다 원수로다, 백 발등이 원수로다" 하는 노래와 함께 "원수로다 원수로다 인간 백발원수 로다."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어 억새풀이 휘날리는 취서산 언덕의 백발 등을 인생의 무상과 함께 원망스러운 어조로 노래를 부르곤 한 다.

    

현재 이곳에는 곳곳에 돌더미가 쌓여 있는데 돌더미가 이처럼 많은 것에 대 해서는 신불산 산신 할머니가 돌을 모아 놓았다고도 하고, 혹은 임진왜란 때 여인들이 치마폭에 돌을 담아 옮겨놓았다는 등의 애기가 있다.
그 러나 사가(史家)들은 이 돌이 임진왜란 때 맨주먹으로 싸웠던 우리 의병들이 무기 대신 이 돌로써 산으로 오르던 왜병들에게 던지면서 끝까지 항쟁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기록을 보면 임진왜란 때 조총을 사용 하고 있는 일본군을 본 우리나라 정규군들은 일본군이 나타나면 도망하 기가 바빴다는데 이처럼 이 지역 사람들이 맨손으로 왜적의 침입에 항거했다는 것을 자랑스러운 일 임에 틀림없다.

    단조성의 위치, 구조와 형태
단조성의 위치는 앞면(동)은 영취산의 정점에서 북쪽 경사진 V자를 따라 내려오면 V자의 오목한 부분에서 다시 V자의 경사지를 따라 올라 간다.
이 V자의 양 끝 지 점이 단조성의 앞면(동쪽)이 된다. 앞면에는 석축은 없으며, 천출로 된 험악 한 절벽을 중요한 요새의 성벽으로 삼았던 것이다.
V자의 오목한 부 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금강골로 내려온다. 이 금강골은 옛날에 배내로 넘 어가는 다섯 재(峴) 중의 하나였다.

그 아래가 사자평인데 임란당 시 의병장 신광윤(辛光胤)이 이끄는 의병들이 왜적을 이 협곡으로 유인 하여 국운을 바꾸어 놓을 만큼 감난(戡難)의 전과를 올렸다고 '흥여승람' '학성금신록' 등의 향토지는 전하고 있다.
그의 임란 때 언양지방의 임 란실기인 ≪감난실적저≫가 있다고는 하나 전하지 아니하여 안타까움 을 더할 뿐이다.
이 금강골 협곡은 암벽등산로 로도 만힝 이용했으나 지금은 포사격장을 인하여 폐쇄 되었다.

    단조성은 임란 때 의병이 쌓았다.
북쪽 면은 V자의 북쪽 끝에서 서쪽으로 경사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평지가 나 온다.
여기까지가 북쪽면인데 성이라 할 것도 없이 폭 10~15m 정도의 돌을 깔 아 놓은 데 불과하다.
이 북쪽면에는 첩(堞:
성위에 나직한 담장)이 없다. 서쪽면은 여기서 남으로 향하여 보면 언덕이 있는데 이 언덕이 유명한 '백발등' 이 다.
백발등 만등까지가 서쪽면이 된다. 백발등에서 동으로 영취산 정점 까지가 남쪽면이 된다.

단조성은 성벽은 없고 폭 10~15m 되는 돌덩 어리를 깔아 놓고 그 위에 네모진 첩(堞)을 연달아 요소 요소에 만들어 놓 고 바닥에는 납작한 돌로 깔아 놓았다. 이 첩(堞)은 높은 성위에 설치한 것 이 아니라 평면위에 돌을 쌓고 첩(堞)을 만든 형태다.
남쪽면과 서쪽 면은 대부분 첩과 첩의 연속으로 되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의병 들이 조를 짜서 거기서 기거를 하면서 수비에 임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단조성은 완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한 성이므로 성이라고 보기에는 무 리가 있다.

여기서 한가지 집고 넘어 갈 것은 단조성의 축조 연대 문제인데, 관 아세서 계획적으로 쌓았다고는 성으 형태로 미루어 보아 믿음이 가지 않는다. 더 욱이 단조성은 해발 1,000m가 넘는 고산의 정상부위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노력동원면세서 무모한 일이며, 이 일대의 산정에는 성을 쌓을 만한 성돌이 없다는 점이다.

한가지 믿음이 가는 것은 여러 가지 향토지 중에 ≪흥여승람≫ (1937)의 충의(忠義)편 신광윤(辛光胤)조를 보면 구덕을 파고, 축원(낮은 담장)을 쌓 고, 석퇴(돌무더기) 수십 개소를 쌓고, 돌무더기마다 <義勇將軍光胤>라고 여섯자를 썬 깃발을 세우고... 하는 기록을 보아 현재 남아 있는 성의 유적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단조성 뻐꾸기

  
 원수로다, 원수로다. 인간 백발 원수로다.
   원 수로라. 원수로다. 백발등이 원수로다.
   오늘도 단조 성 뻐꾸기는 저리도 슬피운다.


영취산 산정 에서 서북쪽을 보면 네모진 돌무더기의 긴 벨트를 보게 되는데 이 돌무더기 벨트가 단조성터이 다.
그 중앙에 야트막한 민둥산이 하나 있다. 이 언덕이 소위 '백발등'이다. 백발등은 서쪽으로 완만하게 뻗어내려 '백연'에서 멈춘다. 이 능선을 '주개덤'이라한다. 영취산 정점에서 남쪽 통도사 뒷산으로 올라가는 경사지를 '시살등'이라 한다.

임진왜란 때 단조성 전투에 관한 기록을 단편 적으로 보이나, 야담과 전설은 더욱 무성하다.
삼남면의 방기리, 가천리 는 물론 양산의 순지리를 비롯 울주군 상북면 배내, 양산 배내 등지인 영취 산, 신불산 주위에 있는 마을에는 어김없이 전해오고 있다.
그 내용 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그 당시 사자평 전투의 의병장이 었던 의용헌 신광윤(義勇軒 辛光胤)의 의용군이 금강골 협곡인 사자평(단 조성)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 금강골 협곡은 험요(險要)하여 '한사람 이 만명을 대적한다.'는 '난공불낙'의 요새였다.
임난 당시의 의용군 의 주 무기는 활, 창, 검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자연물인 돌이었다. 석 전(石戰)으로 공을 세운 사례는 많다. 이 금강협곡에는 '산덜겅'이라 하여 유독 돌이 많아 석전을 벌리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호조건을 갖추고 있 다.

이 계곡에서 의용군은 용감히 싸워 백전백승하여 국운을 바꿔 놓을 만큼 전과를 올린 반면, 왜적은 번번이 패전하여 정면공격으로는 승산이 없자, 인근 마을에서 장상(떡 혹은 술)를 하고 있는 노파에게 환심 을 보이고 떡을 모두 사주면서 정탐을 하게 된다.
무심결에 백발노 파가 하는 말이 '취서산의 앞은 사자(혹은 개)상이고 뒤로는 누운 황소 등과 같다.'라고 하였다. 왜장은 이 정보를 토대로 정면전을 계속하는 척 하면 서 주력부대를 양산 원동방면으로 투입하여 '양산배내'로 올라와 '백연'에서 '주개덤'의 좌우 계곡을 타고 올라, 기습작전을 펴니 격전 끝에 피차간에 큰 타격을 입고 급기야 왜적에게 성을 내주고 '시살등'에서 마지막 응전 을 계속하였다.
이 등에서 활을 쏘았다 하여 '시살등'이라 전 해온다.

단조성 안에 있는 천지(天池)가 피로 물들었다. 하여 '피못 담'이라 전해오 며, 그래서 지금도 흙빛도 붉게 물들어 있다고 전한다.

<자료참조>   '삼남면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