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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을 옛이야기 신동대 굴(窟)

by 가시덤풀 2012. 3. 13.

동굴서 살며 도통한 신동대 오만해져 악행 저지르다
한 노파 만나 깨달음 얻고 도술을 의롭게 쓰지만 …

◀신동대가 살았다고 전해지는 굴의 내부 모습.


통도골을 거쳐 영축산을 오르는 곳. 즉 시살등에서 북쪽으로 500여m 정도 흘러내린 능선에서 다시 북서로 흘러내리는 산 중턱 8부 능선에 거대한 암반이 있는데 그 아래에 ‘신동대 굴’이 있다. 천연석굴인 그 굴에는 이러한 전설이 전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 년 전, 신동대라는 사람이 그곳에 정착해 살고 있었다. 신동대는 그곳에서 혼자 술수(術數)를 연마하고 노력에 노력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도통(道通)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축지법에 능했던 신동대는 어느 날 축지법을 써서 단숨에 한양으로 올라갔다.

한양 구경에 여념이 없던 신동대는 난생 처음 보는 물건들에 신기해했고 이를 본 상인들은 모두 그를 촌놈 취급했다. 화가 난 신동대는 도술을 부려 상인들을 혼내주며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장난질에 재미가 든 신동대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오만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임금이 살고 있던 궁궐을 넘나들며 궁녀들을 농락하며 안하무인의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흉흉한 민심을 잠재우고 궁중에까지 들어와 난리를 피우는 신동대를 잡기 위해 모든 궁녀들에게 명주 실타래를 몸에 지니게 하고 신동대를 만나면 명주실을 그의 옷에 꿰어 놓도록 명했다. 얼마 후 조정에서는 명주실을 단서로 군사를 보내 신동대를 즉시 잡아오도록 했다.

하지만 신동대는 코웃음을 치며 그 즉시 축지법을 써서 중국 안동 땅으로 도망쳤다. 안동 거리를 활보하던 신동대가 인적이 드문 어느 거리에 이르렀을 때 마당을 쓸던 한 노파가 집안을 향해 “조선에 있는 신동대는 하루 저녁에 수 만 리를 왔는데 너희들은 아직도 일어나지 않고 뭣들 하느냐!”고 호통치는 것이었다.

신동대는 그제서야 지금까지 자기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없는 줄 알고 오만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깨달음을 얻은 신동대는 노파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용서를 빌었다.

신동대가 자신을 어떻게 알아 봤느냐고 묻자 노파는 대답은 않고 한양으로 돌아가 장날에 만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이야기를 나누지 말라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조선으로 돌아온 신동대는 도술을 의롭게 썼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게 되자 나라 안에서는 그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다. 그 뿐 아니라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는 의병을 도와 왜군을 무찌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동대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인근 마을로 내려갔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는 전시에도 불구하고 장이 열리고 있었다. 신동대가 식량을 구하고 돌아가려는데 며칠은 굶은 듯이 보이는 한 할머니를 만나게 됐다. 신동대는 그 할머니에게 식량을 나눠 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자신의 과거를 모두 말하고 말았다. 지난 날 중국으로 도망갔을 때 자신을 깨우쳐 준 노파의 말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었다.

그 날 신동대는 바드리고개에서 내려오다 피를 토하고 허무하게 급사하고 말았다. 신동대가 죽은 뒤 그 동굴에는 신동대와 저자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눈 할머니가 들어가 걸식하며 살아갔다. 그러던 중 노파에게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동굴 한 쪽 바위구멍에서 흰 쌀이 한 톨씩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놀랍게도 떨어지는 쌀은 노파가 하루 세 끼 먹을 만큼만 매일 일정하게 나왔다.

그러다 욕심이 생긴 할머니는 쌀을 많이 얻기 위해 바위구멍을 크게 넓혔다. 그랬더니 쌀이 나와야 할 바위구멍에서 쌀은 나오지 않고 물만 한 방울 씩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할머니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후회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쌀은 영영 나오지 않고 물만 떨어졌다. 할머니는 예전처럼 고생하다가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로 사람들은 이 굴을 신동대의 이름을 따 ‘신동대 굴’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지금도 바위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다고 한다.

현재 원동면 장선리에서 영축산을 오르려면 통도골과 시살등을 거치게 된다. 통도골은 통도사로 넘어가는 가장 빠른 길이라 해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산 아래서 통도골과 합쳐지는 곳이 도태정골인데 이는 깨우침을 받은 골짜기란 의미의 ‘도 터진 골’의 변형된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시살등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이 단조성을 빼앗기고 마지막 응전을 벌였던 곳으로 왜군을 향해 활을 쏘았다 하여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 단조성 안에 있는 못은 피로 물들었다하여 피못담이라 하며, 단조성 아래의 붉은 이끼는 의병들이 흘린 피 때문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또 신불평원에는 억새들이 많은데 이 억새는 가을이면 백발처럼 흰 빛을 띠기 때문에 이 언덕을 백발등이라 불렀다하며 인근 마을에서는 아직도 “원수로다, 원수로다, 백발등이 원수로다.”하는 백발가가 전해온다고 한다.

바드리고개(일명 달음재)는 원동면 선리에서 밀양군 단장면 범도리로 넘어가는 향로산 정상과 백마봉 사이에 있는 고갯길로 바드리란 이름은 산중턱에 밭이 많아 ‘밭들’ 또는 ‘달이 밝은 마을(所月里)’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또 달음재는 원동에서 볼 때 달그림자가 걸리는 고개라 해서 달음재라 불렀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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